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고 내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문을 두드리며 말합니다.
내 누이, 내 사랑, 내 비둘기, 내 완벽한 비둘기야, 문 열어. 내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고 내 머리카락에는 밤 이슬이 가득합니다.
아가서 5: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아침에 내 기도가 주께 이르리이다
시편 88:13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응답하십니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 서로를 먼저 생각하고 아끼는 것처럼, 어머니가 “사랑이 답이다”라는 아이의 부름에 즉시 응답하듯이.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와서 내 몰약과 향을 거두어 내 벌통과 꿀을 먹으며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시라” 오늘 솔로몬의 아가는 이 모든 것을 즉시 알게 합니다.
“여인이 어찌 자기 젖먹이를 잊겠으며 자기가 낳은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겠느냐 그가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9:15).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직접적이고 능동적이며 긴급합니다.
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요 1:14)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옷을 입고 우리에게 왔습니다.
내 인생은 우리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그분의 구속이 성취될 때까지, 내 손이 문을 열 때에 내 손에서 몰약즙이 떨어지며 네 손가락이 빗장을 눌렀도다(아 5:4-5). ” 우리 마음에서 그분의 사랑을 빼앗긴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그 사랑은 죽어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들의 우상은 금과 은
손으로 만든
나는 입이 있지만 말을 할 수 없다
난 눈이 있지만 볼 수 없어
나는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한다
그들은 코가 있지만 냄새를 맡지 못한다
손이 있어도 만질 수 없어
나는 발이 있지만 걸을 수 없다
목이 말라도 작은 목소리라도
여유가 없다
(115:4-7).
이것에도 불구하고,
나의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노라
나는 나의 신에게 부르짖는다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시는도다
나는 그의 앞에서 운다
그의 귀에 들렸다
(18:6).
곧 우리 주님의 사랑은 내가 드러내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고 그들이 말하기를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다.
” 그것이 양식이 될 것이나 내 성산에는 없을 것이다.
부상이든 손실이든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이사야 65:24-25). “주 안에서 평안하라 아무리 어둡고 황폐한 우리의 삶이라도 주님은 오실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아가서의 증거입니다.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완전히 깨어 있고 내 사랑하는 사람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내 누이, 내 사랑, 내 비둘기, 내 완벽한 비둘기, 문을 열어줘. 내 머리는 이슬, 밤 머리에 이슬.구나(2).”
한밤중, 차가운 새벽에 당신의 머리카락은 밤 이슬로 덮여 있습니다.
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주님이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옷이 벗어졌으니 어찌 다시 입으리요 내 발은 씻었거늘 어찌 더럽히리이까(3)” 우리는 너무 쉽다.
보호하고 타협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하는 힘은 “내 애인이 문틈으로 손을 내밀매 내 마음이 감동을 받았고 내가 내 애인을 위하여 문을 열었을 때 내 손에서 몰약이 떨어지며 (4-5).” 그리고 그렇게 인생의 시간, 무기력의 시간이 곧 올 것이므로 집주인이 도둑이 올 때를 안다면 그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집이 침입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일이 끝나기 전에 인자가 왔다(마 24:43-44). 할 때 가장 강력할 것입니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감히 내 죽음은 영광이었고 그곳은 축복받은 곳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이 오면 나는 어디에 있을까? 뭐하세요? 생각보다 갑작스러운 두려움이 앞서는 이유는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옷을 입고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16:15) 입니다.
어떤 어색한 순간에 죽음을 준비하는 삶으로서 “상례하러 가는 것보다 잔치에 가는 것이 낫다.
”
이 생각이 이번 주에 나를 괴롭혔고, 요즘 아내와 나는 우리 동네에서 브런치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하고 있습니다.
늙은 어머니를 모시면서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을 호소해서 어제 라면 한 그릇 먹고 그 가격에 커피 한 잔, 김밥이라도 그 시간이 숨 쉬고 있는 건가 싶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사랑이야기는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매 그가 가니 그가 말을 할 때에 내 영이 나가나니 너는 어디 있느냐? “예루살렘의 딸들아 너희가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너희를 사랑하므로 병들었다 하라(8).” 우리의 마음은 항상 다르다, “여자들 중에 아름다운데, 사랑하는 사람이 남의 연인보다 어때요? 사랑하는 사람이 남의 연인보다 어때요,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9).”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태복음 16:26).
왜 우리는 항상 잃어버리고 나서야 소중함을 알까?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 “너희를 거룩하다고 부르신 것 같이 너희 모든 일에 거룩하라”(벧전 1:15). 사실 그는 매번 우리가 할 수 있는 힘을 더한다.
말씀하시되 네 안에서 말씀하시는 이는 네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9-20) 시어머니의 물음이나 아내의 곤란을 당할 때에 성령이 할 말을 가르치시리라”(눅 12:12) 즉, 어떤 사람이 어떤 일로 슬퍼하거나 마음이 아파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나도 나보다 못한 사람이다.
기꺼이 대답하십시오. 항상 대답할 것을 준비하되 겸손과 두려움과 깨끗한 양심으로 하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15-16) 보면 주께서 다 하실 것입니다.
돌아다니며 설교를 수정하고 남의 말이 마음에 머물며 생각을 적는 일이 마치 열린 문과 같으니 “복음을 전하며 화평을 전파하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사람이라 (이사야서 52장 7절) 내가 이것을 할 때마다 여호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느끼고 주님. 이것은 개념도 아니고 이론도 아닙니다.
그것이 거짓이든 사실이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아니하였으면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로마서 10:14- 15) .
주변 사람들부터 가끔 손을 내밀어 엉뚱한 말을 하는 이들에게 “내 사랑은 하얗고 붉고, 많은(10) 중에 도드라져” 오늘은 ‘노래의 노래’의 한 문장이 우리가 숭고함을 말해줍니다.
예, 오랫동안 다시 언급되었습니다.
“흰색”은 “빛나는”, “눈부신”과 같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주님 앞에서 완전하기 때문에 “군중에서 눈에 띕니다”. 탁월함’은 ‘세우다’ 또는 ‘높다’를 의미하므로 우리를 구별하기 위해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었더라”(마태복음 17장) :2)’” 우리는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합니다.
거기로 이끄는 깃발처럼 “그의 거처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이사야 11:10).즉,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립보서 2장) : 9-10).
카페에 앉아 아내는 말이 없었다.
나는 내 말에서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읽습니다.
엄마를 좋아하지만 서로 안부를 묻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는다.
싫은게 아니라 어렵다.
엄마가 오시면 척추가 아프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아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알 수 없는 마음일까? 그래서 요즘은 이른 점심을 먹고 아내와 잠시 동네를 산책합니다.
저녁에는 시어머니와 밥을 먹고 성경을 나눕니다.
어제는 끝없이 이어지는 옛이야기 속에서 장모님을 친하게 지내는 일이 잦았다.
아내가 탁자 밑에서 나를 발로 찼다.
분명히 그만하라고 하셨지만 어머니는 더 말하고 싶었습니다 … 우리 각자는 마음 속에 살고 있으며 아무리 말을해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그토록 섬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할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어제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 말보다 행동이 쉽다… 요즘 나는 일종의 부두교처럼 “단순하게 하자”는 생각을 많이 반복한다.
모든 사람의 삶은 너무 복잡합니다.
그 노인은 그와 같은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고, 개미 감옥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 “예루살렘의 딸들아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우니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니라(16)”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귀하고 측량할 수 없는지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다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나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골로새서 2:9-10). 그의 통치와 권위가 없다면 우리의 남은 삶은 어떻게 될까요?
나의 주 하나님을 구하소서
밤낮으로 네 앞에서 울어
나의 기도가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내 외침을 들어줘
(88:1-2).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나 괴로움 속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주여, 나는 깊습니다
나는 너에게 울었다
주여 내 음성을 들으소서
내 외침을 들어라
(130:1-2).
모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다가올 일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반응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자 즉시 주님이 내게 오셨다.
나는 주님만 바라봤지만 주님은 내가 말하지 않은 모든 것을 들으셨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의 고통을 가져온다
경멸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그에게서 숨지 않았다
당신은 그가 우는 것을 들었다
…
나는 말에 놀랐다
네 시야에서 사라졌어
내가 당신을 부를 때
내 애원하는 목소리를 들어
들었어?
(22:24; 31:22).
이런 날,
나는 무덤에 내려간 사람으로 여겨졌다
약한 전사처럼
죽은 자 가운데 던져진
죽임을 당하고 무덤에 누워 있는 사람처럼.
주님은 그들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신다
그들은 여호와의 손에서 끊어졌느니라
(88:4-5).
주님께 그분의 이름을 부드럽게 되풀이해 달라고 말씀드리십시오. 주님은 먼저 우리를 아시고 함께 하십니다.
모두 괜찮습니다.
“그러므로 능히 설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하지 못하면 시험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리라 능히 감당하느니라”(고전 10:12-13).
당신은 나를 구덩이로 인도합니다
당신은 그것을 어두운 곳에 두었습니다.
…
주여 내가 압니다
나를 멀리 데려가 줘
그들이 나를 미워하는 이유
네가 그랬어, 그래서 난 갇혔어
나는 나갈 수 없어
(6, 8).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나는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내 눈은 환난으로 인해 눈이 멀었습니다.
주님, 나는 매일 당신을 부릅니다
나는 당신에게 손을 들어
죽은 자에게 기적을 보여줄 것인가?
유령들이 일어나 주님을 찬양할까요? (셀라)
(9-10).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주님,
주여 내가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아침에 나의 기도가 당신께 이르리이다
(13) 아멘.